독일이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자동차의 천국이라는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포르셰, 아우디, BMW, 메르세데스-벤츠, 폭스바겐과 같은 유명한 자동차 기업의 탄생지일 뿐 아니라 「아우토반(Autobahn)」, 즉 자동차(Auto) 고속도로(Bahn)가 깔려있는 나라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 「아우토반」은 운전자들의 높은 시민의식과 도로경찰의 철저한 주의 단속 덕분에 속도 제한을 따로 두지 않아도 안전하게 마음껏 달릴 수 있기로 유명하며, 많은 자동차 마니아들이 한 번쯤 달려보고 싶은 고속도로로 꼽히는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현대적인 고속도로로써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우리 대한민국을 포함한 수많은 나라가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벤치마킹한 곳이기도 하죠. 무엇보다, 히틀러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만든 고속도로라는 이야기로도 우리의 흥미를 끕니다. 오늘은 「아우토반」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과연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독일의 주요 도시를 잇는 고속도로, 즉 「아우토반」을 건설하고자 하는 계획 자체는 1920년대에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죠. 그러나 모두 알고 계시듯이 이 당시의 독일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인 나라였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내면서, 그리고 내부의 정치적인 혼란이 가중되면서 「아우토반」 건설 계획 역시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을 기아와 절망으로 몰고 간 세계 대공황을 극복하고 다시금 강대국으로 일구어 내겠다는 야심찬 포부 속에 1933년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게 됩니다. 나치 정부는 정부 재정을 아낌없이 투하하여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임으로써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했습니다. 일단 600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가 이런 식으로 일자리를 되찾고 임금을 벌어 생계가 안정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정부 재정의 투하 없이도 알아서 경제가 호전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죠. 그리고 나치 정부의 계획은 완벽하게 들어맞았습니다. 이때가 1930년대 초중반이니 아직 경제학자 케인즈가 '정부 개입을 통한 대공황의 극복'을 주장하기도 전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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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토반」 건설 계획 역시 이러한 공공사업의 일환으로써 히틀러에 의해 전면에 재등장하게 됩니다. 과거에 포기했던 계획을 되살리고 이를 화려하게 성공시킨다면, 일자리를 창출하고 고속도로를 건설하여 경제를 부흥시킨다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뿐 아니라 히틀러의 업적을 전세계에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건설된 현대적인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이 도로를 건설해낸 사람이 누구인지 계속 마음에 새길 것입니다. 또한 나치당이 줄기차게 선전했던 '독일인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딱 알맞은 것이기도 했죠.

 

 

물론 이런 식의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여 세계 대공황을 극복했던 것이 히틀러만은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세계 최대 수준을 자랑했던 후버 댐을 축조하고,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테네시 강 유역을 개발하여 발전소를 건설하는 등의 공공사업을 벌였습니다. 이것은 「뉴 딜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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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버 댐. 지금 기준으로도 굉장한 크기이다.>

 

 

그렇다면 이제 「아우토반」이 정말 '히틀러의 전쟁기계'였는지와 함께 「아우토반」 건설의 실제적인 효과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봅시다.

 

 

히틀러는 「아우토반」의 건설을 독일의 명문 「뮌헨 공과대학교」에서 건축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프리츠 토트에게 맡겼습니다. 히틀러가 독일의 독재자였다면, 토트는 「아우토반」의 독재자나 다름없었습니다. 히틀러는 토트에게 내각 장관에 준하는 권리를 일임했고, 「아우토반」의 건설에 있어서 그가 토트에게 보내는 신뢰는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토트는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아우토반」에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신기술이었던 고가도로나 새로운 교각, 무엇보다 수학적인 곡선을 그리며 완만하게 꺾이는 커브 구간 등의 기술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세계 최초의 현대적인 고속도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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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에게 모형을 보여주며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는 프리츠 토트. 토트는 히틀러의 신뢰를 등에 업고 자신이 생각한 수많은 신기술을 그대로 적용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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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신기술의 금자탑, 「아우토반」>

 

 

 

또 나치 정부와 토트는 「아우토반」의 건설 과정에서 자연 보호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독일의 자랑인 울창한 숲과 산을 개발하여 직선으로 도로를 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우토반」은 자연물을 우회하는 방식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완만한 커브 구간도 사실은 자연물을 우회하면서도 최대한의 효율을 내기 위한 노력의 일부였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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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보호는 물론 주변 경치와의 조화를 이루는 일 역시 「아우토반」 건설의 주요 고려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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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토반」의 특징인 완만한 커브 구간. 이는 사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도로 주변의 숲을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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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 그루조차!>

 

 

히틀러가 「아우토반」의 군사적인 가치를 아예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아우토반」의 일부 직선 구간은 포장이 더 두껍게 되어있어 전시에는 루프트바페를 위한 비상 활주로로 사용하려는 용도였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아우토반」은 군사적인 목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 근거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우선 군사적인 목적에서 「아우토반」을 건설했다면 수송 효율이 최우선 가치로 고려되었을 테지만 「아우토반」은 그 건설에 있어 수송 효율보다도 안전과 자연 보호, 심지어는 아름다운 주변 경치와의 조화에 더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죠. 그 덕분에 「아우토반」은 속도와 경치 모두를 즐기려는 오늘날의 자동차 마니아들에게는 최고의 도로지만, 군사적인 목적의 도로로서는 최악의 도로나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로 제 2차 세계대전까지만 하더라도 고속도로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독일군은 강력한 기갑부대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고 그래서 오늘날 독일 축구팀을 전차부대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와는 달리 제 2차 세계대전기 독일군의 기계화율은 전혀 높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은 수송용 트럭조차도 충분치 못해 말의 힘을 이용해 물자를 운반하는 것이 더 흔할 정도였죠. 독일군의 전쟁 수행은 고속도로가 아니라 철도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졌습니다. 전통적으로나, 그리고 현실 사정을 고려해서나 독일군에게는 고속도로를 이용한 트럭 수송보다는 철도를 이용한 물자와 인력 수송이 훨씬 중요한 문제였던 겁니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근거는, 설령 상술한 모든 것을 무시하고 「아우토반」이 전쟁 수행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된 것이라 가정해도 애초부터 독일은 「아우토반」을 군사적으로 이용할 능력이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사실 트럭이나 자동차를 이용하는 수송, 다시말해 피스톤 수송은 굉장히 연료를 많이 사용합니다. 철도를 이용한 수송과는 대조적인 부분이죠. 이러한 문제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독일은 물론이거니와 당대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불거진 문제입니다. 다만 단 한 나라, 미국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피스톤 수송을 대량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미국밖에 없었습니다. 피스톤 수송에는 그만큼 엄청난 연료와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며,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미국 뿐이었으니까요. 심지어 그 미국조차도 피스톤 수송만으로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힘에 부쳤습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은 프랑스를 거쳐 독일 방면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거센 독일군의 저항만큼 연합군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물자의 부족이었습니다. 분명 노르망디 항구에 도착하는 물자는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지만, 그 물자를 최전선의 연합군 장병들에게 수송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1941년에 독일군이 소련에서 겪었던 문제를 1944년의 연합군도 프랑스에서 겪어야 했던 겁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단순히 엄청난 수의 화물 트럭을 투입해 수송대를 편성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트럭 수송대는 「레드 볼 익스프레스(Red Ball Express)」라고 불렸으며, 연합군이 마침내 벨기에의 주요 항구도시 중 하나이자 「플랜더스의 개」 이야기로도 유명한 안트베르펜을 점령하기 전까지 연합군의 물자 수송을 도맡았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연합군 내에 만연했던 인종차별 문제로 인하여 고심하던 미군 수뇌부가 「레드 볼 익스프레스」의 주역인 화물 트럭 기사 역할을 흑인 장병들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루프트바페의 맹폭에도 불구, 목숨을 걸고 연합군의 생명줄과도 같은 물자 수송 임무를 끝까지 성공적으로 완수한 흑인들의 위상은 그만큼 높아졌고, 전쟁이 끝난 후 흑인들의 지위가 차차 개선되는데 큰 기여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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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차 세계대전 중의「레드 볼 익스프레스」.>

 

 

이러한 피스톤 수송의 난점을 고려할 때, 분명히 독일에게는 「아우토반」을 전쟁 수행을 위해서 활용할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우토반」이 히틀러의 전쟁기계였다는 이야기는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한 것이죠. 그렇다면 「아우토반」은 경제부흥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잘 달성한 고속도로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아닙니다. 「아우토반」이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1935년 즈음에 이르면, 이미 나치 정부의 경제 재건 정책이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여 실업 문제가 해결되고 세계 대공황이 극복하여 경제가 살아나던 시점이었습니다. 나치 정부의 경제 재건이 히틀러 스스로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빠르고 훌륭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아우토반」 건설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1933년 이전 같았으면 굶주리고 일자리를 찾고자 혈안이 된 600만 실업자들이 「아우토반」 건설 사업에 너도나도 자원하여 순식간에 「아우토반」을 완성시킬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935년에는 이미 많은 실업자가 「아우토반」 건설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임금도 높고 안전하고 편안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상 「아우토반」 건설 사업을 시작하고 보니 지원자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벌써 야심차게 벌여놓은 사업인지라 나치 정부는 울며 겨자먹기로 일해줄 사람을 찾아야 했고, 급기야는 청소년들의 봉사활동을 「아우토반」 건설 사업의 참여로 대신시키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우토반」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까지도 계획대로 전부 완성되지는 못하였고 일부분만 개통된 상태였습니다.

 

 

「아우토반」이 본격적으로 경제부흥의 젖줄이 된 것은 독일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서독이 이른바 「라인 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 재건을 시작한 이후입니다. 서독은 히틀러의 「아우토반」 계획을 이어받아 이를 완벽하게 완수했고, 이 「아우토반」을 따라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가면서 서독은 유럽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의 하나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독일에 여행을 가신다면 분명히 아름답게 뻗어있는 「아우토반」 도로 위를 달릴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이 이야기를 되새겨 보세요. 모르고 달릴 때보다 알고 달릴 때가 훨씬 더 즐거운 여행이 되실 겁니다.